'나를 보내지 마'를 보며 J가 내게 저런 복제인간을 만드는 게 옳은 일인가 물었다.
복제인간이라는 소재 자체가 소설을 쓰기에 좋은 소재라 자주 등장하는 것이지, 비과학적이고 비생산적이라 크게 논할 가치가 없다고 대답했다.
J가 그렇다면 만약 복제인간이 있다고 가정할 때 인간과 차이가 무엇인가 물었다.
'인간다움은 무엇인가.'
인간다움을 판단하기 위해선 '인간'의 시발점을 파악해야한다. 인류의 발자취를 되짚어 올라가다 보면, 인류의 조상이 다른 동물과 차별화된 시점은 불을 사용하면서 부터이다. 불을 통한 음식의 가공을 통해 인류는 타 동물들에 비해 우수한 소화 속도와 우수한 에너지 흡수율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시작으로 인간은 자연을 활용하는 방법을 터득해 나갔다. 약한 개체라는 단점을 가리기 위해 집을 짓고, 도구를 사용하였다. 수월한 생활을 위해 터를 잡고 농경을 시작하였다.
위를 토대로 볼 때 '인간다움'이란 주변을 본인에게 맞춰 변화시키는 것, 즉 '이기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를 보내지 마'에 등장하는 복제인간이라는 존재와 인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아직 복제인간을 본적이 없어서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 복제인간들은 소모품이다. 본인에게 가장 잘 알맞은 장기를 얻기 위해 인간이 비효율적이지만 선택한 하나의 이기심의 결합체라는 것이다. 그들이 감정을 지닌 존재가 될 여지가 있는 것도, 살고자하는 욕구가 생기는 것도, '나'와 가장 비슷한 존재에게서 장기를 얻으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에 불과하다. 만약 그들이 수많은 소설 속 등장인물처럼 본인의 정체성을 고민하다 인간의 명령을 거스르고자 한다면, 그는 폐기처분 되어야 하는 '불량품'에 불과한 것이다.
여러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이런 복제인간들을 보며 '어떻게 저들은 그토록 이기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가'며 개탄의 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과연 그들을 욕하는 인간은 과연 그들을 욕할 자격이 있을까. 100명을 연쇄살인한 범죄자가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특강을 하면 그 누가 그 강의를 듣겠는가. 우리의 삶도 이기심으로 씻을 수 없을만큼 얼룩져있다.
간단하게 나의 삶의 부분들을 토대로 이를 판단해 보자. 먼저, 방금 먹은 저녁은 돼지와 김치와 쌀 등이 들어있는 김치볶음밥이었다. '자연의 동물들도 돼지와 쌀 등은 먹지 않느냐'할 수 있지만, 자연의 포식자들이 다른 동물의 살을 줄이고 근육량을 늘리면 늘렸지 그 어떤 포식자도 사냥감을 가둬놓아서 근육량은 줄이고 살은 불린 후에 먹지 않는다. 풀을 먹는 동물들도 유전자를 변형시켜 억지로 많은 영양소를 열매에 저장시키지 않고, 본인이 섭취하는 식물만 자라고 다른 식물들은 자라지 못하도록 억제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내가 앉아서 글을 쓰고 있는 이 집을 보자. 아마 먼 과거에는 나무와 풀이 무성하여 다양한 생명체들에게 삶의 터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들어오기 시작하며 나무를 베고 큼직한 길을 트기 시작했을 것이고, 벤 나무들로 집을 짓고 살다 시멘트로 집을 짓기 시작하고 길에는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붓기 시작했을 것이다. 해봤자 나뭇가지를 꺾어 본인이 머물만한 공간을 마련하는 동물들과는 달리 자연을 적극 파괴해 인간이 살기 좋게 하여놓고, 다른 동물들이 본인의 공간에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방충망부터 각종 약까지 동원하여 본인의 공간을 유지하려 애쓴다.
지금까지는 인간이 자연에서 무언가를 착취하는 것만 기술했으나, 인간끼리, 나아가 인간-집단 간에도, 집단-집단 간에도 이기심은 늘 존재한다.
이 또한 내 삶의 부분들을 토대로 찾아보자면, 내가 지금까지 가족에게 받아 쓴 돈은 과연 몇억이며, 그들이 나를 위해 한 노동 또한 어마어마하다. 비단 가족과 나의 관계에서 벗어나서, 내가 사용하는 휴대폰을 만든 제조사는 나의 자본을 가져가기 위해 아래도급 업체를 학대해 싼 가격으로 소비자들에게 승부를 걸고 있으며, 이 휴대폰을 사용하며 내게 제공되는 수많은 카카오톡 같은 서비스는 내게 수많은 광고를 노출하며 본인들의 이익을 증대시키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 복잡하게 돌아가는 사회 속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기업이 각자의 이익 증대를 위해 살아간다.
우리가 다닌 학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과연 순수하게 학생을 가르치고자 하는 열정으로 교수/교사가 되신 분은 몇이나 있으며, 순수한 배움을 위하여 부모님에게 손은 일절 벌리지 않고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몇이나 있을까.
좀 더 범주가 넓은 예시로는,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을 들 수 있다. 인간의 역사는 귀족이 평민과 노예를, 영주가 농노를,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며 발전해왔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모두 부정할 수 없이 이기심의 자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