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10/26
눈물이 가득했던 인생에서 제일 슬픈 생일이었다.
집안의 사정으로 11월은 부모님 곁을 떠나 서울에서 맞았다.
감사하게도 이모 댁에서 지내다, 이모가 이사하시며 내가 지낼 공간이 사라졌고, 이모가 보유 중이시던 빌라의 작은 방에서 혼자 살기 시작했다.
달콤한 생활이었다. 용돈도 어느 정도 있었고, 남자 하나 먹고 살만큼 버는 건 크게 문제도 없었기에,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살았다.
그렇게 살다, 부산으로 돌아가게 됐다.
아무래도 열어놓고 쓰는 일기장이라, 나만 보는 일기장에나 쓸 수 있을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쓰다 보니 굉장히 전개가 뜬금이 없다.
혼자 살기엔 최적의 조건이 아니었을까 싶다.
LP판이 없어 LP를 돌려보진 못했다. 이모가 들으시던 LP들이 있긴 했는데 상할까 봐...
15년도에 나온 에미넴 LP 세트를 사볼까 고민하다, 들으면 들을수록 훼손된다는 게 마음에 들질 않아서 aux케이블 구매하고 휴대폰으로 무손실 음원들 트는 선에서 만족했다.
덕분에 집에 소주, 맥주, 보드카가 항상 있었다.
큰 산이 아니라 두 바퀴는 돌아야 한 시간이 소요된다.
중간에 가로등이 하나도 없는 구간이 있는데, 한 일주일 걷다 보니 길이 외워지기도 하고, 눈이 좋아져 어느 정도 보이기 시작해서 다니는 데 크게 문제는 없었다.
부산이라는 눈이 희귀한 지방에 살다 보니 눈이 신기하기도 하고, 밟으면 나는 소리도 좋다.
거기다 이렇게 아무도 걷지 않은 길에 처음 발자국을 남기는 건 잠깐이나마 닐 암스트롱이 된 기분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깔때기 거미라는 거미였는데, 호주에 사는 친구는 사람을 죽일 정도로 독성이 있다더라.
한국에 사는 깔때기 거미는 물리면 붓는 수준에서 끝나긴 하지만, 성격이 굉장히 공격적이란다.
키워볼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먹이로 줄 게 딱히 없어 키우진 못하고, 방생을 해주려다 워낙 빠르게 도망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죽였다.
'수라'라는 시의 영향도 있고, 중학교 때 법명을 받으며 불살생을 맹세한 것도 있고 해서 죽이고 싶진 않았는데..
사진을 자주 찍는 성격이 아니라 사진은 별로 남지 않았지만, 경험한 추억들은 꽤 오랜 시간 내 머릿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막상 마지막 날 잠을 잘 때도 별 느낌은 없었는데, 가방에 짐들 구겨 넣고 보니 참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나의 20대 초반을 함께한 서울, 이젠 안녕!
눈물이 가득했던 인생에서 제일 슬픈 생일이었다.
집안의 사정으로 11월은 부모님 곁을 떠나 서울에서 맞았다.
감사하게도 이모 댁에서 지내다, 이모가 이사하시며 내가 지낼 공간이 사라졌고, 이모가 보유 중이시던 빌라의 작은 방에서 혼자 살기 시작했다.
달콤한 생활이었다. 용돈도 어느 정도 있었고, 남자 하나 먹고 살만큼 버는 건 크게 문제도 없었기에,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살았다.
그렇게 살다, 부산으로 돌아가게 됐다.
아무래도 열어놓고 쓰는 일기장이라, 나만 보는 일기장에나 쓸 수 있을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쓰다 보니 굉장히 전개가 뜬금이 없다.
혼자 살기엔 최적의 조건이 아니었을까 싶다.
LP판이 없어 LP를 돌려보진 못했다. 이모가 들으시던 LP들이 있긴 했는데 상할까 봐...
15년도에 나온 에미넴 LP 세트를 사볼까 고민하다, 들으면 들을수록 훼손된다는 게 마음에 들질 않아서 aux케이블 구매하고 휴대폰으로 무손실 음원들 트는 선에서 만족했다.
덕분에 집에 소주, 맥주, 보드카가 항상 있었다.
큰 산이 아니라 두 바퀴는 돌아야 한 시간이 소요된다.
중간에 가로등이 하나도 없는 구간이 있는데, 한 일주일 걷다 보니 길이 외워지기도 하고, 눈이 좋아져 어느 정도 보이기 시작해서 다니는 데 크게 문제는 없었다.
부산이라는 눈이 희귀한 지방에 살다 보니 눈이 신기하기도 하고, 밟으면 나는 소리도 좋다.
거기다 이렇게 아무도 걷지 않은 길에 처음 발자국을 남기는 건 잠깐이나마 닐 암스트롱이 된 기분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깔때기 거미라는 거미였는데, 호주에 사는 친구는 사람을 죽일 정도로 독성이 있다더라.
한국에 사는 깔때기 거미는 물리면 붓는 수준에서 끝나긴 하지만, 성격이 굉장히 공격적이란다.
키워볼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먹이로 줄 게 딱히 없어 키우진 못하고, 방생을 해주려다 워낙 빠르게 도망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죽였다.
'수라'라는 시의 영향도 있고, 중학교 때 법명을 받으며 불살생을 맹세한 것도 있고 해서 죽이고 싶진 않았는데..
사진을 자주 찍는 성격이 아니라 사진은 별로 남지 않았지만, 경험한 추억들은 꽤 오랜 시간 내 머릿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막상 마지막 날 잠을 잘 때도 별 느낌은 없었는데, 가방에 짐들 구겨 넣고 보니 참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나의 20대 초반을 함께한 서울, 이젠 안녕!